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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ial

문해력과 단어 선택하기 (feat. 심심한 사과)

무료한 사과는 free apple

작년에 심심한 사과는 뜨거운 사과 중 하나였다. 이외에도 이지적, 고지식하다가 있으며, 사흘 역시 뜨겁게 달굴 수 있는 단어다. 문해력에 대한 논의는 많다. 이 글에서 세대적인 부분들은 제외한다. 대부분 감정적인 싸움만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나는 이지적이다라는 단어는 이지적이다라는 말이 논란이 되었을 때 처음 알았다. 기억을 못 할 수도 있지만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는 단어였다. 나름 신문이나 책도 많이 읽는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영상보단 활자로 된 매체를 선호하기에 이러한 문제에서 한 발 벗어났다고 생각했었다.

 

어찌 보면 방어기제에서 나온 생각일 수도 있지만, '심심한 사과'의 정확한 뜻이나 한자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더 많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뉘앙스나 맥락으로 단어를 이해하여, 사과문에 '심심한 사과'가 나와도 곡해하지 않는 사람을 제외하고도 '심심한 사과'라는 단어 자체를 잘 아는 사람들은 많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뉘앙스나 맥락으로 단어를 이해하여, 사과문에 '심심한 사과'가 나와도 곡해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는 할 수 있다. 학습적인 표현으로 하자만, '심심한 사과'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 단어다. 이런 측면에서 생각하면, '심심한 사과'를 가르칠 것이 아니라, 곡해하지 않고 읽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더 유용하다.

 

모르는 단어가 없는 사람을 존재할 수 걸어 다니는 국어사전이 아닌 이상 모르는 단어는 항상 나올 수밖에 없다 생각한다. 문맥적으로 이해하면 되지 않냐고 할 수도 있지만, 문맥적으로 이해하는 것도 한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문맥으로 이해하는게 만사형통일까?

일례로, '육군훈련소가'의 가사에는 '관창의 어린 넋이 지하에 혼연하니'라는 가사가 있다. 훈련소에서 나는, '혼연하다'는 말의 뜻을 몰랐고, (섞일 혼 + '만연하다'의 연)의 결합이라 생각하고 지하에서 혼들이 섞인 채로 만연한 상태로 놓여있는 것인 줄 알았다. 전쟁터에서 죽는 사람들은 넘쳐나기에 당연히 그럴듯했었다. 하지만 이는 완전히 틀린 해석이다. '혼연'은 '다른 것이 조금도 섞이지 아니한 모양'을 의미한다. 즉, 가사의 의미는 관창의 넋이 지하에서도 섞이지 않은 채로 있다는 의미가 된다.

 

환경은 주어졌다.

이처럼, 모르는 단어를 만났을 때, 문맥이나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활용하여 유추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찾아보는 것이다.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인해 어디서나 인터넷이 가능하게 바뀌었다. 이러한 현대의 환경은 모르는 지식을 찾기에는 과거의 비해 아주 좋아졌다. 모르는 단어를 찾기 위해 국어사전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점만 봐도 그렇다. 다만 그렇게 찾지 않고 화를 먼저내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일 뿐이다.

 

그것도 모르다니

"어려운 한자어 단어 A도 모른다니 무식하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똑같은 태도로, "중학생도 알 영어단어 B도 모른다니 무식하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어려운 한자어를 잘 쓰는 이지적인 사람이지만, 아파트에 노인정 대신 senior club이라고만 적혀 있으면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제, 'senior club'이란 '어렵지 않은' 단어를 모르는 사람의 문제일까? 아니면 영어로만 적고 한국어 표기를 적지 않은 아파트의 문제일까?

 

어떤 단어를 선택할까?

글을 쓰든, 말을 하든 단어를 어떤 것을 선택할지는 고민이 많이 된다. 어려운 단어를 선택해서 있어 보이게 만들려는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일부러 쉬운 단어가 있음에도 어려운 단어를 고르는 것이다. '고르다'를 '택하다'로 바꾼다던지, '바꾸다'를 '변경하다'라고 하는 것이 그 예다.

 

쉬운 단어, 어려운 단어 중 어떤 것을 써야하냐에 대한 정답은 없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잘 표현하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동진 평론가의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 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라는 영화 "기생충"의 평론은 나로선 '명징'이란 단어를 찾아보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었던 평론이었다. 너무 어려운 단어를 썼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단어를 사용한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표현하려고 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어려운 단어를 사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 줄 평이라 불가능했겠지만, 글이었다면 명징이나 직조가 어떤 뜻인지 주석을 더해 독자의 이해를 도왔다면 이해하기 어렵다는 비판은 적었을 것이다.

 

독자나 청자를 고려하기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뜻을 잘 표현하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큼 중요한 것이 독자나 청자를 생각하면서 단어를 사용하고, 말을 덧붙이는 것이다. 어려운 단어와 쉬운 단어 모두 뜻이 통한다면 쉬운 단어를 쓰는 것이 좋다. 글이라면, 예상되는 독자의 수준을 고려하여 주석을 다는 것도 중요하다. 글에 주석을 다는 것은 몇 초 안 걸릴 뿐만 아니라 내가 단어를 오용하고 있지는 않은지도 확인할 수 있다. 오해를 방지하는 데 들이는 시간은 매우 짧지만, 글이 읽히고 나서 오해를 해소하는데 들이는 시간은 매우 크다. 

 

물론 어디까지 독자를 고려해야하는지는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는 나눠볼 수 있다. SNS나 커뮤니티같이 접근성이 높고 가벼운 매체에서 쓸 단문의 글이라면 독자의 수준을 낮게 상정해야한다. 이 경우에 어려운 단어 대신 쉬운 단어 위주로 선택해야할 것이다. 예를 들면 구화에서 등장할만한 단어를 사용해야한다. 반대로 장문의 글이나 공식적인 글이라면 독자의 수준을 높게 상정하여 어려운 단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위의 'senior club'의 사례는 이용자의 수준(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연령)을 고려하지 않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참고 글

'심심한 사과'문단에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사람이 하나 있었다. 경향신문의 컬럼, '문해력 부족에 혀만 찰 일인가'는 놀랍도록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적혀있다.

요약

1. 어려운 단어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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